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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엽집

홍익인생 2020. 3. 5. 20:51


만엽집(만요슈)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가집(歌集)인데, 대략 아스카~나라 시대에 채록되었으므로 당시에는 일본어를 표기할 히라가나/가타카나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한자의 음, 훈, 기타등등을 활용하는 매우 복잡한 표기법인 만엽가명(만요가나)를 사용했는데 그 기묘함이 실로 판타짓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만요슈'는 어떠한 표기체계를 이루고 있기에 본문 해독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할까? 이제부터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 보자. '만요슈'의 표기체계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다음 문제를 풀어보자. 여러분은 다음의 단어를 몇 개나 읽을 수 있을까?

1) 法師
2) 五位
3) 耳
4) 目
5) 恋水
6) 金風/白風
7) 耶麻
8) 孤悲
9) 夏樫
10) 馬声蜂音石花蜘蛛


만요 표기에 관한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1에서 4까지는 무난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중략 - 참고로 1은 ほふし(ほうし), 2는 ごゐ(ごい), 3은 みみ, 4는 め임)

5부터는 어떨까? 5부터 10까지의 정답은 다음과 같다.

5) なみた (涙 - なみだ, 눈물)
6) あきかぜ (秋風, 가을바람)
7) やま (山)
8) こひ (恋 - こい, 사랑)
9) なつかし (懐かし, 그립다)
10) いぶせくも

5는 상당히 매력적인 표기로, 한자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6의 경우 궁금한 것은 金이나 白을 어떻게 '아키'(あき:秋) 라고 읽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오행설에 기인한다. 오행설에서는 모두 하나로 통하기 때문. 이와 같이 일본어에서 한자의 쓰임이 정확하지 않고, 그 뜻으로 유추하여 사용되는 것을 '의훈한자'(義訓漢字) 라고 한다. 3에서 6까지는 한자의 훈을 빌어서 표기하는 방법이었다.

다음의 7에서 10까지는 한자의 표음성을 이용한 표기다. 7에서 산이라는 의미의 '야마'(山)을 '耶麻'로 표기한 경우나 8에서 님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고이'(恋)를 '孤悲'라고 표기한 것은 소위 만요 가나에 의한 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것은 사용하는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이 음만을 빌어서 표기하는 것으로 '차음가나'(借音仮名) 표기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음만을 빌어서 사용한 것은 아닌 듯하다. 가능한 한 어휘의 뜻에 가까운 한자를 선택하고 있어서, 8의 경우를 보면 만요시대 사람들은 사랑을 '홀로(孤) 애태우며 슬퍼하는 것(悲)' 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8의 경우가 한자의 음을 빌어 온 것이라면 9는 반대로 한자의 훈을 빌어다가 어휘의 음을 표기한 형태다. 이는 한자의 의미와는 아무 관계없이 음만을 비는 것으로 9는 '그립다'라는 '나쓰카시'(なつかし)를 표기하는 데에 여름이라는 '나쓰'(なつ)와 떡갈나무라는 '카시'(かし)의 음만을 빌어 '나쓰카시'(なつかし)라고 표기한 것이다. '만요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조사 '-かも'를 '-鴨' (오리 압字, 일본어로 오리는 'カモ')로 표기하는 것도 이와 같은 방식이다. 이렇게 어휘의 훈을 빌어 음을 표기하는 형태를 '차훈가나'(借訓仮名) 표기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10의 경우를 보자. 만요 표기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1부터 9까지 나름대로 읽을 수 있었던 사람도 10에 이르러서는 아마도 두 손을 들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이 표기는 '만요슈'의 제 12권 2991번의 제 4구에 등장한다.


垂乳根之
母我養蚕乃
眉隱
馬声蜂音石花蜘蛛荒鹿
異母二不相而
たらちねの
ははがかふこの
まよごもり
いぶせくもあるか
いもにあはずして
우리 어머니
키우시는 누에가
고치에 있듯
답답한 마음이여
님 만나지 못해서



해당 부분의 어휘는 답답하다, 개운치않다라는 의미의 '이부세시'(いぶせし)라는 형용사로, '이부세쿠모 아루카'(いぶせくもあるか)라는 영탄의 형태로 쓰였다. 문제의 부분을 살펴보면 '馬声'을 '이'(い)로, '蜂音'을 '부'(ぶ)로, '石花'는 '세'(せ)로 읽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석화(石花)는 '거북손'이라는 바닷가에 사는 동물로 일본어로 '세이'라고 읽는 데서 연유한다. 마지막의 '蜘蛛'는 '거미'(일본어로 クモ)의 한자 표기이므로 설명에서 제외하더라도, 나머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馬声을 '이'로 읽고 蜂音을 '부'로 읽었을까? 만요 시대 사람들은 말이 우는 소리를 '이-잉'(い-ん)으로, 벌이 날아다니는 소리를 '부'(ぶ)로 들었기 때문이다. '만요슈' 안에는 이런 종류의 표기가 많아서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의식이나 언어생활의 일면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어휘를 하나 더 소개하기로 하자. 만요시대의 여성들이 사용하였던 거울이면서 동시에 제사도구였던 '마소가가미'(まそ鏡)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의 표기 중에 '喚犬追馬鏡' 이라고 하는 표기가 보인다. 여기서는 '喚犬'을 '마'(ま)로, '追馬'를 '소'(そ)라고 읽고 있다. 이를 통해 만요시대 사람들은 개를 부를 때에 '마앗'(まっ), 말을 몰 때에 '소옷'(そっ)이라고 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어휘를 표기할 때 다른 어휘의 훈을 빌어 음으로 이용하는 것을 '의훈가나'(義訓仮名) 표기라고 한다.

이상으로 '만요슈'의 문자표기 방법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새삼 옛사람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최충희, '일본시가문학사', 태학사 2004 pp.51 ~ 54





그 지혜로 그냥 표기법을 일관화 해주기를 바래


만엽집은 만들어진지 불과 150여년만에 일본인 자신들조차도 몇몇 구전되어온 노래를 바탕으로 '재구'해서 '해독' 해내기 전에는 읽지도 못하는 암호덩어리가 되어버렸는데, 거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표기는 삼국시대에 이미 사용되고 있던 이두식, 향찰식 표기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이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좀더 '창의적'인 표기법들이 다양하게 추가되었을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이런 만엽가나가 나중에 부분적으로는 히라가나/가타카나로 변하고, 또 어떤 것은 한자 그대로 남아서 지금의 일본어 표기법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중국/한국인이 보기에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인 일본의 한자읽기가 이런 식으로 탄생했다는 것.




Post Script :

최근에 번역자 분들의 무한한 수고를 통해 겨우 나오고 있는 한국어판 만엽집에서는 와카 특유의 마쿠라코토바(枕詞)를 굳이 번역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보기에는 극도로 함축적인 마쿠라코토바의 특성상 그게 더 맞는 것 같다.) 거기에 따르면 위의 시는 아래와 같이 번역해도 될 것 같다.

(다라치네노)
엄마가 치는 누에
고치에 숨듯
답답한 마음이여
님 만나지 못해서

('다라치네노'는 구체적인 의미는 아직 불명인, 주로 부모 양친과 관계된 것을 수식하는 마쿠라코토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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